부모님이 빚을 남기고 돌아가셨을 때 상속인이 택할 수 있는 길은 크게 둘입니다. 상속포기와 한정승인입니다. 가장 큰 차이는 빚이 다음 순위 가족에게 넘어가느냐입니다. 상속포기는 넘어갈 수 있고, 한정승인은 넘어가지 않습니다. 이 차이를 모른 채 결정하면 정작 본인은 빚을 면하고도 부모님이나 형제, 조카에게 독촉장이 날아가는 일이 생깁니다. 아래에서 두 제도의 차이와 선택 기준, 반드시 지켜야 하는 3개월의 기한, 그리고 그 기한을 놓쳤을 때의 구제 수단까지 차례로 살펴봅니다.
상속포기와 한정승인은 무엇이 다른가요?
핵심은 상속인 지위를 버리느냐, 지위는 유지하되 책임 범위에 한도를 거느냐입니다.
상속포기는 상속인의 지위 자체를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상속의 포기는 상속이 개시된 때에 소급하여 효력이 있으므로(민법 제1042조), 처음부터 상속인이 아니었던 것으로 취급되어 물려받을 재산도 빚도 모두 받지 않습니다.
한정승인은 상속을 받되 조건을 붙이는 것입니다. 상속으로 얻은 재산의 한도에서만 피상속인의 채무를 변제하겠다는 조건이며(민법 제1028조), 물려받은 재산이 5,000만 원이고 빚이 1억 원이라면 5,000만 원 한도에서만 갚으면 되고 나머지는 책임지지 않습니다. 내 고유 재산까지 헐어서 빚을 갚을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자녀가 상속을 포기하면 빚은 누구에게 가나요?
같은 순위 상속인이 모두 포기하면 빚은 다음 순위 상속인에게 내려갑니다. 다만 배우자가 살아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상속 순위는 자녀(직계비속), 부모(직계존속), 형제자매, 4촌 이내 방계혈족 순이고(민법 제1000조 제1항), 상속인이 여럿인 경우 어느 상속인이 포기하면 그 상속분은 다른 상속인에게 그 상속분의 비율로 귀속됩니다(민법 제1043조).
여기서 중요한 예외가 있습니다. 배우자가 살아 있는 상태에서 자녀들만 전부 상속을 포기하면, 그 상속분은 손자녀나 다른 순위로 내려가지 않고 살아 있는 배우자에게 귀속되어 배우자가 단독상속인이 됩니다(대법원 2023. 3. 23.자 2020그42 전원합의체 결정 참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생존해 계신 상황에서 자녀들만 포기하면, 빚은 손자녀가 아니라 어머니께 집중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배우자가 없거나 배우자까지 함께 포기한 경우에는 손자녀 등 후순위 상속인에게 빚이 넘어갑니다. 그래서 선순위 상속인이 모두 포기한 탓에 돌아가신 분의 부모나 형제자매, 손자녀에게 뒤늦게 빚 독촉장이 날아와 온 가족이 줄줄이 상속포기를 하게 되는 일이 드물지 않습니다. 반면 한정승인은 상속인 본인이 상속인 지위를 유지한 채 빚을 재산 한도로 막아버리는 것이라 후순위 상속인에게 빚이 넘어가지 않습니다.
상속포기와 한정승인 중 무엇을 택해야 하나요?
빚의 규모가 불확실하면 한정승인이, 빚이 재산을 명백히 초과하는 것이 확실하면 상속포기가 대체로 적합합니다.
한정승인이 유리한 경우는 어디에 얼마의 빚이 있는지 파악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사업을 하셨던 분의 상속이 대표적입니다. 한정승인을 해두면 나중에 숨어 있던 빚이 추가로 발견되더라도 물려받은 재산 한도에서만 책임지면 됩니다(민법 제1028조). 후순위 가족에게 빚이 번지는 것을 원천적으로 막을 수 있다는 점도 큽니다. 자녀가 한정승인을 하면 부모나 형제자매까지 줄줄이 상속포기를 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상속포기가 적합한 경우는 빚이 재산을 명백히 넘고, 후순위 상속인에게 넘어가도 문제가 없거나 후순위 상속인도 함께 정리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절차가 한정승인보다 단순하고, 물려받을 재산이 어차피 없으니 재산 목록 작성이나 청산 절차의 부담도 없습니다.
가족 전체를 빚에서 보호하려면 어떻게 하나요?
상속인 중 한 명이 한정승인을 하고 나머지는 상속포기를 하는 조합을 실무에서 자주 씁니다.
한 명이 한정승인으로 상속인 지위를 유지하면, 나머지가 포기한 상속분은 다른 상속인인 그 한정승인자에게 귀속되므로(민법 제1043조) 후순위 상속인에게 빚이 넘어가지 않습니다. 가족 전체가 보호되고, 재산 목록 작성과 청산 절차는 한정승인을 한 한 명만 부담하면 됩니다. 다만 이런 설계는 가족 구성과 재산 상황에 따라 달라지므로 전문가와 상의해 정하시는 편이 안전합니다.
상속포기와 한정승인의 기한은 언제까지인가요?
상속개시 있음을 안 날부터 3개월입니다. 사망한 날이 아니라 안 날이 기준입니다.
상속인은 상속개시 있음을 안 날로부터 3개월 안에 단순승인이나 한정승인 또는 포기를 할 수 있습니다(민법 제1019조 제1항). 대법원은 이 기산점을 단순히 사망 사실을 안 날이 아니라, 상속이 개시된 사실과 더불어 그로 인해 자기가 상속인이 되었다는 사실까지 안 날로 봅니다. 대부분은 부모님의 사망을 안 날과 본인이 상속인이 된 사실을 안 날이 일치하지만, 선순위 상속인의 포기로 뒤늦게 본인이 상속인이 된 경우처럼 사망 사실만으로는 자신이 상속인임을 알기 어려운 사정이 있다면 그 사실을 실제로 안 날부터 3개월이 시작됩니다.
이 3개월은 제척기간이라 한 번 지나가면 되돌리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기간이 모자랄 부득이한 사정이 있다면 기간이 끝나기 전에 가정법원에 연장을 청구할 수 있지만(민법 제1019조 제1항 단서), 일단 지나버린 뒤에는 아래에서 볼 특별한정승인 외에 달리 구제받기 어렵습니다.
3개월이 지나버렸다면 방법이 없나요?
특별한정승인이라는 구제 장치가 있습니다. 다만 조건이 붙습니다.
빚이 재산보다 많다는 사실을 중대한 과실 없이 3개월 안에 알지 못한 채 단순승인을 하게 된 경우에는, 그 사실을 안 날부터 3개월 안에 한정승인을 할 수 있습니다(민법 제1019조 제3항). 여기서 단순승인에는 아무 조치도 하지 않아 단순승인한 것으로 간주된 경우까지 포함됩니다.
조건은 중대한 과실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였다면 빚이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상속인 본인이 증명해야 합니다. 인정 여부도 개별 사정에 따라 달라지므로, 처음부터 기한을 지켜 정식으로 한정승인이나 상속포기를 해두는 것이 가장 확실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나요?
빚을 전부 떠안게 됩니다. 가만히 있는 것이 가장 위험한 선택입니다.
3개월 안에 한정승인이나 포기를 하지 않으면 단순승인을 한 것으로 봅니다(민법 제1026조 제2호). 단순승인은 재산이든 빚이든 그대로 물려받는 것이라, 빚이 재산보다 많아도 본인의 재산으로 갚아야 합니다.
상속재산에 손대면 왜 위험한가요?
예금을 인출해 쓰거나 부동산을 처분하면 단순승인을 한 것으로 간주되어, 상속포기나 한정승인이 막힐 수 있습니다.
상속인이 상속재산에 대한 처분행위를 한 때에는 단순승인을 한 것으로 봅니다(민법 제1026조 제1호). 다만 상속재산이 훼손되지 않도록 보존하거나 관리하는 행위까지 금지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재산의 가치나 성질을 바꾸는 처분에 해당하는 행위입니다. 어디까지가 허용되는 관리이고 어디부터가 위험한 처분인지 판단이 어렵다면 결정 전에 확인을 받으시고, 고인의 재산은 가급적 결정이 끝날 때까지 그대로 두시는 편이 안전합니다.
정리하면
빚이 재산보다 많은 것이 확실하고 가족 관계가 단순하다면 상속포기가 깔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빚의 정확한 규모를 알기 어렵다면 한정승인이 더 안전합니다. 받은 재산 한도라는 안전장치가 걸리고, 가족에게 빚이 번지는 것도 막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상속 문제는 3개월이라는 기한이 정해져 있고, 한 번의 선택이 본인뿐 아니라 온 가족의 재산에 영향을 미칩니다. 재산 목록 작성, 채권자에 대한 공고, 청산 절차 등 한정승인 이후의 실무도 만만치 않습니다. 부모님의 채무 가능성이 보인다면 너무 늦기 전에 법률 전문가와 상의해 가족에게 가장 적합한 방법을 설계하시기를 권합니다.
이 글은 위광복 변호사(법무법인 원결 대표변호사, 대한변호사협회 등록 가사법·노동법 전문변호사, 연세대학교 겸임교수, 법무부장관·보건복지부장관 표창)가 작성했습니다. 구체적 사안에 대한 상담이 필요하시면 변호사와 직접 상의하시기 바랍니다.
참고 법령
민법 제1000조(상속의 순위) ① 상속에 있어서는 다음 순위로 상속인이 된다. 1. 피상속인의 직계비속 2. 피상속인의 직계존속 3. 피상속인의 형제자매 4. 피상속인의 4촌 이내의 방계혈족
민법 제1019조(승인, 포기의 기간) ① 상속인은 상속개시있음을 안 날로부터 3월내에 단순승인이나 한정승인 또는 포기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기간은 이해관계인 또는 검사의 청구에 의하여 가정법원이 이를 연장할 수 있다. ② 상속인은 제1항의 승인 또는 포기를 하기 전에 상속재산을 조사할 수 있다. ③ 제1항에도 불구하고 상속인은 상속채무가 상속재산을 초과하는 사실(이하 이 조에서 "상속채무 초과사실"이라 한다)을 중대한 과실 없이 제1항의 기간 내에 알지 못하고 단순승인(제1026조제1호 및 제2호에 따라 단순승인한 것으로 보는 경우를 포함한다. 이하 이 조에서 같다)을 한 경우에는 그 사실을 안 날부터 3개월 내에 한정승인을 할 수 있다.
민법 제1028조(한정승인의 효과) 상속인은 상속으로 인하여 취득할 재산의 한도에서 피상속인의 채무와 유증을 변제할 것을 조건으로 상속을 승인할 수 있다.
민법 제1026조(법정단순승인) 다음 각 호의 사유가 있는 경우에는 상속인이 단순승인을 한 것으로 본다. 1. 상속인이 상속재산에 대한 처분행위를 한 때 2. 상속인이 제1019조제1항의 기간내에 한정승인 또는 포기를 하지 아니한 때 3. 상속인이 한정승인 또는 포기를 한 후에 상속재산을 은닉하거나 부정소비하거나 고의로 재산목록에 기입하지 아니한 때
민법 제1042조(포기의 소급효) 상속의 포기는 상속개시된 때에 소급하여 그 효력이 있다.
민법 제1043조(포기한 상속재산의 귀속) 상속인이 수인인 경우에 어느 상속인이 상속을 포기한 때에는 그 상속분은 다른 상속인의 상속분의 비율로 그 상속인에게 귀속된다.
참고 판례
대법원 2023. 3. 23.자 2020그42 전원합의체 결정